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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부정공>양벽정지사실기(漾碧亭址事實記)
漾碧亭址事實記 昇平之廣川江上有漾碧亭即吾先祖三灘先生講道之所也先生當仁明之際見乙巳禍機己兆卜築于此與金河西白玉峰兩先生爲道義交同舟唱和時人比之李郭故事焉則雖有芑樑之塵豈能穢吾一髮哉亭畔醉岩即先生肖像閣也亭下船遊錄即三賢姓啣也上有漾碧亭三字皆玉峰先生筆也左有鄭松江趙重峰宋淵齋三先生及鄭三芝金砥齋兩公前後嶝臨而且題焉以此觀之亭之爲亭不問可知爲勝境古語云賢人所過山川艸木皆有精彩豈不信矣乎英祖丙辰重創矣其後累經兵燹亭遂邱墟舟人指點行路咨嗟此亦否泰相尋之理也奈何奈何是地眞天成別界不食一堆岩石拱揖花石包圍而但介於弓梅雨里出入之口故近居愚民或侵我樹木或害我基址非止一再從高祖聾隱公五度聞官以復舊址官題立案分明如昨日事是以往在丁卯滄庵灘雲竹圃三公倡率諸宗亭復舊面眞盛事也何幸如之至于今日農路擴張自官行之氣高萬丈或爆破我岩石或掘擲我屏障此所謂防禦無策時任東厚以聾隱之孫竹圃之胤左周右旋盡心力而救之終不遂意故陳情于道文政課終至中央廳保護然後始得安枕計其歲籲凡三個星霜矣計其出入手胼足胝矣若是乎守成之難也盖如是故雖不無破壞狀態而向所謂三賢刻固自若也亭顔貌亦自若也己抑又思之曾與遠近士友作契置田者欲其永久維持之方也建醉岩閣又買附近林野及河川畧干欲備後慮也吁亦善哉當時效誠者東洙鍾淵鍾龜慶洙貞洙也相議爲記者致洙東勲東日也 戊申閏七月二十三日曉燈 後孫 東貴 謹記 양벽정지사실기(漾碧亭址事實記) 승평의 광천강 있는 양벽정은 곧 우리 선조 삼탄부군이 도의를 강마하던 곳이다 부군이 인종(仁宗), 명종(明宗) 때에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싹이 트는 것을 보고는 이곳을 찾아 와 정자를 짓고 김하서(金河西), 백옥봉(白玉峰) 두 선생과 더불어 도의(道義)로써 친교를 맺고 지덕(志德)이 상합(相合)하여 시를 읊고 이에 화답하니 그 시대 사람들이 이응(李膺)과 곽태(郭泰)의 고사(故事)에 비유하였은즉 비록 이기(李芑) 이양(李樑) 더러운 자들이 있었으나 어찌 나의 한 털을 더럽힐 소냐. 정자 언덕에 있는 취암각(醉岩閣)은 곧 부군의 진상각(眞像閣)이요, 정자 아래의 선유록(船遊錄)은 三현의 성함을 내긴 것이며 양벽정 액호 세 글자는 모두 옥봉 백 선생의 글씨였다. 정송강(鄭松江), 조중봉(趙重峰), 송연재(宋淵齋) 세 선생 및 정삼지(鄭三芝), 김지재(金砥齋) 두 공이 차례로 등임하여 영가수창(咏歌酬唱)하였으니, 이로써 보건대 정자의 풍재(風裁品格)을 가히 미루어 알겠다. 옛말에 『어진 사람의 지낸 바에 산천초목이 다 정채(精彩)가 있다.』 하였으니, 참으로 진실한 말이로다. 영조(英祖) 병진년(一七三六)에 거듭 창건하였더니 그 뒤에 여러 차례의 병화로 인하여 마침내 빈 터만 남아 사람들은 그곳의 위치만 기억하고 길 가는 사람은 슬퍼해 마지않게 되었으니 이 또한 비(否)가 다하면 태(泰)가 오듯 이치는 순환하는 것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여기는 참으로 하늘이 이룩한 특별한 곳으로 침식되지 않은 암석이 읍하는 듯하고 꽃나무 둘은 둘러쌓는데 다만 궁각(弓角), 매우(梅雨) 두 마을의 출입구에 있는 고로 근처의 우매한 백성들이 혹 우리의 나무를 베어 가며 또한 우리 정자의 터를 침해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종고조(從高祖) 농은공(聾隱公)이 다섯 번이나 관청에 청원하여 옛터를 회복한 일이 어제 일같이 분명하므로 지나간 정묘년에 창암(滄庵), 탄운(灘雲), 죽포(竹圃) 세 공이 여러 종족을 불러 거느리고 정자를 중건하였으니 참으로 경행(慶幸)한 일이로다. 시대가 변천함에 따라 관부로부터 농로(農路)를 확장하라는 지시가 내리니 부락사람들이 기고만장하여 우리의 바위돌을 폭파하고 둘러 있는 병장을 파헤치려 하니 방어할 계책이 없었다. 그때 문임(門任) 동후(東厚)가 농은공(聾隱公)의 손자요, 죽포공(竹圃公)의 윤자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심혈을 경주하였으나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시 도청과 중앙청에 호소하여 보호한 연후에 비로소 안심하였으니, 그 횟수를 헤아리면 무릇 三개 성상이요, 그 출입을 논하면 손이 깨지고 발이 부르텄으니 지키고 이룸이 이와 같이 어려운 것이다. 대개 이와 같이 하였기 때문에 비록 파괴한 것이 없지 않으나 삼현선유록과 기타 각명한 것이며 정자가 다 무사하였다. 아니 또 생각하니 일찍이 원근의 사우와 더불어 계를 만들어 전답을 산 것은 영구히 유지하고자 한 방법이었고 취암각을 세우고 부근의 임야와 하천 약간을 점유한 것은 후환을 대비한 것이니 감탄과 함께 착한 일이로다. 당시에 지성을 다한 자는 동수(東洙), 종연(鍾淵), 종구(鍾龜), 경수(慶洙), 정수(貞洙)요, 상의하여 기록을 청한 자는 치수(致洙), 동훈(東勲), 동일(東日)이었다. 後孫 東貴 삼가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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